2008/02/02 05:04

국제연합과 냉전 이후의 세계질서와 현대세계 *ITALIA

= [국제연합]의 탄생과 [냉전], 그리고 냉전 이후의 세계질서와 현대세계 =



제2차 세계대전 초반,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던 미국과 영국 등의 정치인들은 이와 동시에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존재하였던 “국제연맹”이 국제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점을 통감하고, 이를 개선하여 새로운 국제평화기구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먼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은 1941년 8월에 영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독일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개최한 회담이기도 했었던 “대서양 해상에서의 영국 순양함에서의 회담”에서 이른바 “대서양헌장 - 전쟁을 끝낸 이후 국제평화와 전세계 사람들의 복지 등을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기구의 창설에 합의하는 내용의 헌장”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던 1945년 2월에는 당시 소련의 휴양지로서 이름이 높았던 (그리고 현재도 우크라이나의 휴양지로서 이름이 높은) 얄타에서 훗날 이른바 “얄타의 3대 거두(巨頭)들”로 불리게 되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 등이 후일 “얄타회담”으로 불리게 되는 회담을 실시하였다.




거기서 또한 이들은 전쟁 후 독일을 소련이 관할하는 동독과 그리고 미국과 영국 (여기에 점령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명분을 위한 “꼽사리”로서 프랑스를 가세시켜서) 서독으로 분할하는 문제 및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가하는 문제를 논하면서, “전쟁 이후의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해서” 논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10월, 이들 나라들의 주도하에 50여개 국가들의 대표들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모여서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다른 국가의 정치적 독립에 대한 무력 사용을 금지한다”는 내용 등을 기본원칙으로 하는 국제연합(UN - United Nation)의 탄생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던 경제대공황과 같은 사태가 다시 일어나는 것도 막기 위하여 국제연합 휘하의 조직으로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등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연합이 이전의 국제연맹과 크게 다른 점은 이러하겠다.
즉, 미국이 참가를 하지 않아서 주먹이 존재하지 않았던 국제연맹과 달리, 이제 미국과 소련 등의 강대국들이 참가함으로서 국제연합은 그 기본원칙을 실현시키기 위한 (원칙대로라면 필요한 때에 동원이 가능한) 주먹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주먹이 없어서 사용을 할 수 없었던 국제연맹과 달리 국제연합은 “주먹이 있어도 사용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벌어지게 되었던… 국제연합의 핵심인 두 초강대국들인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에 따른 기나긴 대립 때문이었다.



원래 소련이라는 공산주의국가가 생겨났을 당시부터 미국과 영국 등의 자본주의국가들은 이를 크게 경계해왔고, 또한 그렇기에 (처음에는 적-백 내전 당시에 백위군을 돕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시도가 결국 적군과 공산당과 레닌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되자) 이 나라의 영향력이 소련 외부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해왔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들은 추축국 동맹 세력이라는 공동의 적에게 대응하기 위하여 손을 잡았다. (이러한 상황은 한편으로는 중국에서의 제2차 국공합작이 대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막상 전쟁이 끝나자 (중국에서는 제2차 국공합작이 파기되어지고, 그와 동시에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듯이) 이들은 다시금 대립과 갈등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들 세력은 이러한 상황 하에서 바로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먼저, 독일군을 쫓아가다보니 “어쩌다가” 획득하게 된 동유럽지역의 여러 나라들에 소련은 (아예 이들 지역을 점령하여 소련 땅으로 편입시키는 식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취하는 대신에) “그 나라의 공산당원 출신으로서 소련 정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를만한 자들”을 골라서 “공산당 정권”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라들에서 “공산당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또한 그 파괴되어진 경제력 등도 회복시켜서 그러한 “소련 정부의 말을 잘 들을 자들의 정부들”을 안정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이 동유럽 지역 국가들을 정복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말을 잘 따라줄 정부를 세우는 것을 너머서, 이참에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과거 제국주의시대의 국력을 상실한 서유럽까지 정복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국도 이들 나라들의 부흥을 지원해주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은 서독에서부터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와 그리스와 터키까지의 (동유럽지역과 소련에 대한 방어벽이 되어줄만한) 모든 지역들에 대해서 대규모의 경제적 지원을 실시하게 되니 이를 (그 정책의 입안자였던 국무장관 마셜장군의 이름을 따서) “마셜플랜”(Marshall Plan)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먼저 미국이 “소련의 서쪽으로의 진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서유럽 국가들을 참가시켜서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창설하였고, 이에 소련도 “NATO가 공산주의국가들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동유럽 국가들을 참가시켜서 (같은 공산주의국가인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WTO(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하여 군사적 대립관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에 따른 사전 준비작업의 일환으로서 소련은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와 서독 등의 자본주의국가들이 앞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체결되어진 얄타회담 등에 의하여 분할 받은 “(동독 내부의) 서베를린”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육상교통로를 봉쇄한바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미국 등은 자신들이 보유한 수송기 등을 거의 모두 동원하여 서베를린에 사는 “서독 주민들”에게 생필품 등을 지원하여 이들이 서베를린을 떠남으로서 결국 이 곳을 미국과 서독 등이 포기하게 만드는 사태를 방지하였다. (물론, 소련은 이러한 조치가 이렇듯 아무런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미국 등도 동독을 포함한 여러 동유럽국가들 등에 대하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방해조치를 취하자 소련도 손을 들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이 서로에 대한 전쟁을 실시해도 될 만큼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다고 생각되던) 1950년대까지 핵폭탄 및 그 핵폭탄을 적 지역까지 실어 나른 다음 떨어뜨릴 수 있는 폭격기와 미사일 등을 개발하고 또한 그 양도 “너무나도 많이” 보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여차하면 전쟁개시 하루(나중에는 몇 십분 정도)만에 양쪽 모두 망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본격적인 전쟁이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그 뒤, 이러한 상태로 “냉전”(冷戰, Cold War)이라는 이름의 “전혀 평화로운 것 같지 않은데 현실은 (예전과 달리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가 수십년을 이어가게 된다.



이렇듯 유럽에서 시작되어진 냉전은 아시아에서는 사실상 “열전(熱戰, Hot War)에 가까운 냉전”으로 나타나게 된다.

먼저, 1949년에 드디어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국민당 정권을 오늘날의 대만으로 쫓아버린 다음,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1950년에는 소련과 미국에 의하여 북한과 남한으로 분할되어졌던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미국 및 기타 (미국과 손잡은) 서방진영에서는 (이 때에는 그 뒤의 상황과 달리 소련의 “방해”가 없었기 때문에) 국제연합의 이름으로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도 김일성 등의 요청으로 군대를 보내게 되면서, 냉전시대 최초의 국제적 전쟁으로 확산되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식으로 혼란한 전쟁을 치른 뒤, 이 전쟁은 “휴전”으로 마무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외에도, 베트남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일어났던 공산주의자 호치민 등이 일단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막상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 만들어진 남쪽의 남베트남 정권과 대립하여 북베트남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고…,
이러한 남베트남을 이번에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자 하는 미국이 지원해주게 되면서,
그리고 이번에는 중국과 소련이 북베트남을 지원해주게 되면서,
베트남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단지 무기 등만을 지원하였던 소련 및 중국과 달리) 직접 군대를 보내어 싸웠다가 결국 1975년에 남베트남의 멸망 및 (북베트남에 의한) 베트남 통일 이후 패퇴하게 되는 미국에게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제정치적으로 큰 피해를 남겨준 전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미국은 이로 인하여 자본주의국가들의 리더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소련도 1962년의 “쿠바사태” 당시에 미국에게 “양보”(미국과 가까운 공산주의국가였던 쿠바에 미국을 위협하기 위하여 배치하기 시작한 핵미사일 등을 다시 철거하여 소련으로 되가져감)를 한 일 때문에, 그리고 그 뒤에 1980년대에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침공”에서의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한 사실” 때문에, 그들도 공산주의국가들의 리더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렇듯 미국과 소련 등의 초강대국들이 두개의 패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던 때에,
이번에는 과거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로서의 운명을 감수해야했었던 나라들이,
새로운 세력으로서 그리고 세계사의 새로운 주체로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즉, “제3세계권 국가들의 탄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미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배를 받던 때부터 시작되었던 식민지 국가들 및 민족들의 반제국주의투쟁은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국제질서의 상황 속에서 그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경제력과 군사력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이제는 미국에게 구걸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 등은 식민지 국가들 및 민족들이 지속적으로 전개하던 반제국주의투쟁을 막기 위한 싸움(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압작전”)을 실시할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베트남, 미얀마(버마), 인도 및 기타 중동의 여러 국가들을 해방시켜줄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아프리카의 여러 민족들도 더 이상 “영국과 프랑스 등의 지배를 받는 것이 그들의 운명인 듯 한 … 아는 것이 없고 시커먼 얼굴과 몸을 지닌 야만인 부족들”이 아닌 “자신들의 어엿한 주권국가를 지닌 시민들”로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독립된 국가를 만들게 된다.



특히, 1960년에 이러한 이유로 독립을 획득한 아프리카의 국가들의 수가 17개나 되었기 때문에, 국제연합에서는 1960년을 “아프리카의 해”로서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해방 혹은 독립 되었다고 해서, 그 이후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과거 제국주의열강들의 또 다른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름대로 뭉쳐서 “제3세계권”(미국이 주도하는 제1세계권에도 그리고 소련이 주도하는 제2세계권에도 결코 속하기를 거부하는 국가들)을 형성하기로 한 이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먼저 1955년에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회의를 열어 “반식민주의와 평화공존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평화 10원칙” 등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회의는 계속되어지고 있으며, 또한 이들 제3세계권에 참여하기 시작한 나라들의 수도 이제는 남미 등에 분포하는 나라들 등의 과거 미국의 영향 하에 놓여있었던 나라들까지 합쳐짐으로서 그 수도 120여개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지닌 오랜 식민지경험은 과거 그들이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여러 본받을만한 전통들을 파괴하였고 또한 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이들은 새로운 국가의 사회구조를 제대로 디자인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식민지시절 동안 단지 제국주의열강들의 산업을 위한 원료 및 연료 등의 생산과 그 산업에 의해서 생산되어진 제품들의 소비시장 역할만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이들 나라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개발하고 또한 이를 가공할 기술도 없었고, 게다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공업제품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여전히 가난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제국주의열강들이 물러난 뒤, 이들 중 대부분은 다시 과거 제국주의열강들의 나라에서 만들어진 다국적기업들에 의하여 “식민지지배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지배”를 받게 되기도 한다.)



게다가, 해방 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그리고 스리랑카 등이 독립해나갔던 인도에서의 예처럼 종교나 종족, 그리고 이데올로기(이념) 때문에 대립하게 된 것도 이들 나라들의 시민들이 여전히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 원인이 되었기도 하다.
물론, 그나마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아직도 이들이 갈 길은 멀고 험하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함으로서 전세계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그에 따른 혼란을 불러일으켜왔던 냉전체제는 서서히 무너져가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일반인들의 생각보다도 일찍, 그리고 심지어 그 당시를 살아가던 대다수의 사람들도 모르게 너무나도 서서히 무너져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붕괴는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공산주의국가들의 리더였던 소련은 미국과 미국을 따르는 자본주의국가들과의 전쟁에 대비한 무리한 군사력 확충 및 공산주의동맹국들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과다한 군사원조 등으로 인하여 - 원래부터 중공업 및 군수공업 중심의 산업시스템과 개인의 사유재산 소유를 금지하는 등의 조치에 따른 근로의욕 저하 등으로 인한 경제력 부실이 심각한 상황 속에서 - 경제가 악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 더하여 동유럽에서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이어 마침내 폴란드의 바웬사 등에 의한 본격적인 반소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더 나아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공산주의국가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중국이 나름대로 국력을 키워 소련에 맞서기 시작하면서 소련의 리더십이 손상을 입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앞서 언급하였듯이) 쿠바사태에서의 “실패”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서의 명분 없었음 및 그 뒤의 피해속출 등도 소련의 리더십이 손상 받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국가들의 리더였던 미국도 소련과 소련을 따르는 공산주의국가들과의 전쟁에 대비한 무리한 군사력 확충 및 국제사회에서의 여러 전쟁들에 대한 개입 등으로 인하여 - 비록 그 경제력이 대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 경제력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국제정치적 영향력 등이 약화되어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앞서 언급하였듯이) 1975년의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는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결정적인 악재(惡材)였다. 여기에, EC(유럽공동체)에서 EU(유럽연합)로 발전하게 되는 수준의 유럽통합, 그리고 몇몇 분야에서는 미국을 능가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된 일본의 경제성장 등도 미국이 자본주의국가들의 리더로서의 자격을 유지하는 것을 더 이상 못하게끔 흔들어놓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요즈음 들어서는 정치체제만 사회공산주의고 실은 자유자본주의체제인 중국도 이에 가세하고 있다.)




게다가, 제3차 세계대전 및 그에 따른 인류 전체의 종말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어지면서, 반핵 그리고 반전 운동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지면서 이들 나라들도 “어쩔 수 없이”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시대적 거대 흐름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먼저…,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1980년대 말엽부터 정치에는 자유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고 경제에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식의 “개혁개방정책”(페레스트로이카 & 글라스노스트)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급기야 당시 “아버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지중해의 작은 섬 몰타에서 1989년 12월에 “미국-소련 정상회담”을 실시하여 핵무기 등을 감축하는 내용 및 NATO와 WTO(바르샤바조약기구)의 군사적인 요소를 제거하자는 내용 등에 합의함으로서, 결과적으로 “냉전시대가 종식되었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유럽지역에서는 동독의 시민들이 봉기하여 베를린장벽을 붕괴시켰고, 그 다음해에는 독일이 통일되었으며, 그 외에 여러 동유럽 국가들에서 공산당정권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 결국 이들이 공산주의국가의 상태를 종결시키는 사태에 이르렀다.




더더군다나, 소련에서도 1991년 8월에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반대하는 골수 공산당원들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이에 대하여 시민들이 이러한 공산당출신 정치가들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면서, 이로서 1917년부터 내려온 공산당정권이 붕괴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스탈린에 의하여 사실상 강제로 편입되다시피 하였던 … 과거 소련을 구성하던 여러 나라들과 민족들이 1992년이 오기 직전에 해방을 맞게 되면서, 그렇게 해서 1992년 정월에 러시아를 중심으로 이들 나라들이 규합하여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면서, 이로서 최초의 사회공산주의국가 소련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



소련이 이렇듯 사실상 붕괴되어지면서, 이후의 국제질서는 1991년의 걸프전쟁을 기점으로 다시 한번 그 국력의 건재함과 막강함을 확인시킨바 있는 … 미국이라는 - 이제는 세계 유일의 - 초강대국에 의하여 국제질서는 운영되게 되었다.
또한, 냉전체제 동안에는 이데올로기(이념) 때문에 뭉쳐있었던 나라들 혹은 기타 미국 혹은 소련이라는 초강대국들의 질서에 어느 정도 순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나라들이 자본주의체제와 공산주의체제의 대립이라는 냉전 상황이 종식되어지면서 …,
본격적으로 민족분쟁 혹은 종교분쟁, 기타 여러 가지 자원 등을 비롯한 현실적인 이권과 관련되어진 분쟁들을 실시하면서, 세상은 여전히 혼란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